「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647) 8월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혜성이 남쪽에서 나타났고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八月 彗星出於南方 又衆星北流) 이 기록 뒤에는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 세 성을 에워싸므로, 왕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가 막게 했다는 기록이 뒤따르고 있다.

한데 주의할 것은 이 8월조 기록이 실은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八月 彗星出於南方 又衆星北流' 뒤에 따라오는 16글자가 목판으로 판각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탈락됐다는 사실이다.

현재 유포되고 있는 「삼국사기」 영인본은 거의 예외없이 1512년(조선 중종 7)에 목판으로 찍어낸 이른바 만력본이라는 것이다. 만력본은 완질(完帙), 즉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판본으로,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모신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사적 제154호)과 이병익(李炳翼)이라는 사람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이 만력본은 완질이라고 하지만 목판에 글자를 옮겨 새기는 과정에서 더러 판각이 탈락된 곳이 있는데 진덕왕 원년조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혹자는 문장이 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반론할 수 있겠으나, 16글자가 탈락됐음은 명백하다. 「삼국사기」가 전형적인 기전체(紀傳體) 사서임은 주지하는 바이고, 이런 특성 때문에 왕조별 통사인 본기(本紀)의 경우 각 왕별 재위 연대순으로 기록해 나간다.

만력본은 이런 본기 기사를 목판화하면서 아주 특별한 규칙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각 왕 재위 연대별로 사건을 기록하되 햇수를 단위로 문단, 즉 줄을 쪼개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같은 해의 각기 다른 달에 일어난 사건은 몇 월인지에 상관없이 칸을 띄우거나 줄을 바꾸지 않고 연달아 새겨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진덕왕 원년 8월조 기록이 끝난 뒤에는 16글자가 들어갈 자리를 몽땅 비운 채 같은 해 12월조 기록으로 곧바로 넘어가고 있다. 만력본 목판 인쇄체제를 볼 때 이 빈 칸에는 원래 꽤 긴 문장이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가 있을까? 바로 여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선 그것을 보기 전 몇 가지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추려보자. 백제본기 문주왕 3년(477)째 기록을 모두 옮긴 것이다.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重修]했다.

여름 4월에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封)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흑룡은 동양에서 흔히 불길한 징조로 평가됐다. 한데 흑룡이 출현한지 두 달 뒤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는 사건이 뒤따르고 있다. 5월 흑룡 출현 기사가 얼마 뒤에 있을 곤지의 죽음을 예고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천재지변이 전쟁이나 반란 발생은 물론이고 곤지와 같은 중요한 인물의 죽음을 예고하는 경우는 「삼국사기」에서 허다하게 발견된다. 신라본기 문무왕 13년(673)조 기록을 통째로 옮긴다.

'봄 정월에 커다란 별똥별이 황룡사와 재성(在城) 중간에 떨어졌다. 강수(强首)를 사찬으로 삼고 해마다 조(租) 200섬을 주었다.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했다. 여름 6월에 호랑이가 대궁(大宮) 뜰에 들어왔으므로 죽였다.

가을 7월 1일 (김)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반란을 꾀해 당(唐)에 붙으려다 일이 탄로나 목베여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은 천인(賤人)으로 삼았다' 별똥과 호랑이 출현이 김유신의 죽음이나 대토의 반란과 같은 좋지 않은 일을 예고하는 흉조로 신라인들이 파악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여기서 본론으로 돌아가 진덕왕 원년 8월 '혜성이 남쪽에서 나타나고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는 기록 뒤에 무슨 사건이 나와야 할 지 우리는 아직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분명 전쟁이나 반란 혹은 중요한 인물의 죽음과 같은 흉사가 따라와야 한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도대체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화랑세기」 필사본 13대 풍월주 용춘공전에 나오는 기록이다.

'태화 원년 8월에 (용춘이) 세상을 떠나니 나이 70세였다' 태화 원년은 진덕왕 원년(647)이다. 용춘은 진지왕의 아들로 이찬을 지냈으며 나중에 (양)아들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함으로써 갈문왕으로 추봉(追封)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따라서 틀림없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 8월조에 탈락한 내용은 용춘의 죽음을 알리는 기록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 감정을 위한 아주 중요한 단서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의 사망연대를 추적함으로써 이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신빙성을 검증받은 기존 사서와 대조검토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 연합뉴스 기자 김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