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은 부정확하고 기회는 자주 오지 않으며, 그래서 판단은 더욱 어렵다(히포크라테스)고 했던가. 홍석민 박사는 고민에 빠졌다. 소요군의 각종 헬기에 TOD(열상장비) 기술을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인데, 전력화 소요시기가 핵심기술 개발 완료 시기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를 어렵게 만들었다.

응용연구 단계에서 확보한 완전하지 못한 기술을 체계개발에 직접 적용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체계개발 기간은 불과 3년 6개월. 이중 핵심 센서인 열상모듈 개발에 주어진 시간은 1년 6개월에 불과했다. 남은 기간은 체계 조립 및 조정·기술시험·군 운용시험·규격화 등에 할애해야 하는 기간이었다. 이것은 체계 개념 설계가 초기에 완료된 이후 딱 한 번 열상모듈 시제를 만들어 볼 기회가 있으며 그 시제를 직접 체계에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열상모듈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 전체의 성패가 달린 문제였다.

홍박사는 기회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이번 기회를 놓치면 공통 모듈의 의미마저 퇴색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는 팀원을 전부 불러모았다. 그리고 ‘개발참여’ 의사를 밝히고 협조를 구했다.

“주어진 여건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응용연구 단계에서 이제 마지막 한 번 남은 시제 기회에, 3세대 열상센서의 경우는 단순한 기술 확보를 넘어서 무기체계 적용성과 응용성을 입증하는 시험개발급으로 개발을 해야 하겠습니다. 또 당장 헬기에 장착해서 기술을 입증할 수는 없으므로 국내에서 개발 중인 ‘군단정찰용 무인항공기(UAV)’에 장착이 가능토록 시제를 개발합시다. 기술개발도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려운 일인 줄 잘 알지만 TOD도 개발했는데 노력해서 안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홍박사의 이 모험과 도전을 전제로 한 중대선언에 연구원들은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이제 TOD라는 길고 험난한 고비를 겨우 넘겼는데 다시 가시덤불로 뛰어들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도 없지 않았다.

“처음에 연구원들은 응용연구 단계에서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을 제시했어요. 응용연구 결과만으로 체계개발의 성공 여부를 절대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전력화 시기를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던 까닭입니다.”(김창우 선임연구원)

그래도 이미 결정은 내려진 일. 연구팀은 다시금 마음을 하나로 결집했다. 시험개발 기간에 할 일들을 앞당겨 달성해야 했으므로 그만큼 연구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투입하는 일이 중요했다. 일과 후에도 연구에 전념하다 밤늦게 귀가하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곤 했다. 이런 일상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1998년 12월, 제98-45차 획득실무협의회는 헬기용 전방관측 적외선장비 사업을 정부 주도의 연구개발 대상사업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핵심 센서인 열상모듈을 국내에서 개발하는 계획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됐다. 연구팀은 이제 뒤로 물러설 수도 없게 됐다.

한편 ‘군단정찰용 무인항공기’에는 무인항공기 체계의 선행개발부터 이스라엘에서 도입한 열상모듈이 탑재, 시험되고 있었다. 선행개발에는 1세대 열상모듈이, 그리고 실용개발에는 2세대 열상모듈이 도입돼 결합, 운용 중에 있었다. 열상장비 연구팀은 그동안 간혹 무인항공기용 열상장비를 국내에서 개발해 성능을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시기적으로 워낙 맞지가 않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어차피 각군의 헬기에 동일 기술의 3세대 열상모듈을 개발, 탑재해야 하는 것이다. 좀 일찍 무인항공기에 탑재해 시험해야 했고, 또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홍 박사는 1999년 초 무인항공기 개발사업 책임자였던 장진석 박사(현 국과연 부장)를 찾아갔다. 열상장비 개발 현황을 설명하고 무인항공기용 열상모듈 시제가 완료되면 무인항공기에 탑재, 시험해 줄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사실 계획에 없었던 일이어서 뭐라고 확답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연구팀의 열의가 대단한 것을 느꼈습니다. 또 핵심 센서를 국내 개발한다는 것은 향후 생산이나 정비 유지 측면에서도 대단히 유리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완성된 시점에서 상세히 검토하고자 했습니다.”(장진석 박사)

열상장비 연구팀은 99년 12월 말 응용연구를 종료했다. 그해 10월부터 열상모듈의 조립에 들어가 구성품과 기본 성능시험을 12월 말까지 종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술의 타당성까지만 입증하는 응용연구 시제는 아니었다. 무기체계 적용성을 입증해야 하는 시험개발급 시제로 개발된 것이었다. 연구팀은 여기서 내쳐 나아가 2000년 2월10일까지 사전에 준비된 규격(안)으로 체계 적용성 시험과 환경시험까지 수행했다.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무인항공기에 탑재할 영상감지장치 안에 열상모듈이 내장되기 때문에 영상감지장치와의 연동성도 사전에 모두 확인했다. 연구팀으로서는 당장이라도 무인항공기에 시제품을 달아 날려도 좋을 것만 같았다.

다시 무인항공기 개발사업 책임자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이때 사업책임자는 장진석 박사에 이어 김종성 박사가 맡고 있었다. 김박사는 열상장비팀의 홍박사와 여러 곳의 정보 세미나에서 자주 발표를 하고, 회의에도 함께 참석했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김박사는 규모가 큰 체계사업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사전 계획되지 않은 핵심 부품이 새롭게 투입되는 데 대한 부담감도 컸지만 흔쾌히 적극적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벌써 무인항공기의 기술시험이 완료되고 막 군의 운용시험이 시작되려는 시점이어서 사전에 잘 조율된 정책결심이 필요했다. 우선 국방과학연구소 자체의 추진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연구관리팀의 이효종 팀장은 김박사와 홍박사를 불러 무인항공기 체계 운용시험과 전력화 추진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내 개발 열상모듈의 시험 방안을 강구했다. 국방부의 승인을 얻어 육군본부와 육군교육사령부 시험평가단의 통제 하에 추진하는 것을 건의하는 것으로 시험 기간 중 상호 긴밀히 협조하도록 의견을 조정했다.

무인항공기 사업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업체주도 개발 사업이었기 때문에 KAI의 협력과 지원도 필수적이었다. 또 누구보다 실제 군의 운용시험을 주관하는 실무자 즉 교육사 시험평가단 주무장교의 의견이 매우 중요했다. 주무장교는 강명광 중령이었다.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