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탄용 텅스텐 중합금 관통자 (9)

연구팀이 ‘지렁이 현상’ 분석에 분주할 즈음 철갑탄 생산업체인 (주)풍산은 텅스텐 중합금 재료를 생산하면서 적잖은 고민으로 두통을 앓다시피 했다. 양산로(爐)를 이용한 소결공정 중 소결 로트(lot)에 따라 충격인성값이 달리 나타나는 예가 자주 발생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규정 물성치(specification)보다 낮거나 한계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규정 물성치는 안전도와 성능을 보장하기 위해 최소한계에서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미달했다는 것은 곧 불량품을 의미한다. 관통자와 같이 군수용 물품들은 공정마다 국방품질관리소의 엄격한 공정체크를 받도록 규정돼 있으며, 이 규정에 따라 물성치를 만족하지 못할 경우 다음 공정에 투입할 수 없었다.

풍산에서 관통자 재료를 담당하고 있던 박경진 대리(현재 부장)는 이 규정 물성치 미달의 소결 로트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는 열처리하는 재료의 직경이 50mm에 달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직경이 크기 때문에 열처리하는 효과가 재료내부까지 충분히 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열처리를 반복 실시하면서 재료의 물성치를 규정 이상으로 올리고 로트마다의 편차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반복된 열처리를 통해 본래의 충격인성치를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 이 내용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팀에 알려왔다. 연구팀은 처음에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사실 그때까지 텅스텐 중합금은 반복 열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해봐야 효율성만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렁이 현상과 같은 계면 현상이 열처리과정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던 연구팀은 반복 열처리에 의해 나타난 효과는 물성 회복이라기보다 충격인성치를 높일 수 있는 요소로 판단했다.

그런데 풍산에서 열처리한 시험편을 놓고 분석에 들어갔으나 미세조직에서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없었다. 다만 텅스텐과 텅스텐 계면에서 무심코 봐서는 잘 모를 듯한, 즉 계면에서의 기지상(基地相·matrix) 양이 증가한 듯한 느낌 정도였다. 이 조그마한 변화가 텅스텐 중합금 관통자를 더 단단하고 질기게 만들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연구팀은 풍산에서의 공정을 보다 자세히 조사하고 국과연 내에서 체계적인 실험계획을 짜고 실제 실험에 돌입했다. 연구진 모두가 소재실의 3인치 소결로(爐)와 2.5인치 열처리로에 달라붙었다. 그 결과 반복되는 열처리 속에 재료 - 텅스텐 중합금 미세조직이 완전히 변화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앞에서 언급됐듯이 텅스텐 중합금은 텅스텐 입자와 니켈·철로 이뤄진 기지상으로 구성돼 있는데 반복 열처리에 의해 이 기지상이 텅스텐과 텅스텐 사이 계면을 계속 침입해 들어간 것이다. 이에 따라 텅스텐 입자끼리 접촉(contiguity)하는 비율도 낮추는 미세조직 변화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텅스텐의 취약점은 텅스텐 입자의 계면에 있었습니다. 이 계면의 접촉도가 많을수록 깨지거나 부러질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다시 말해 접촉도가 적을수록 재료의 취약성은 감소하고 반대로 충격인성은 높아지는 거죠. 그동안 텅스텐 입자의 접촉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텅스텐 함량 자체를 줄이지 않고는 불가능했습니다.”(노준웅 박사)

연구팀이 고온과 상온으로 20회 정도 반복 열처리를 가하자 텅스텐 입자 접촉도는 거의 ‘0’ 수준으로까지 내려갔다. 새로운 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단지 열처리만 반복해 주는 간단한 방법을 썼을 뿐이었다. 이것은 기존 텅스텐 중합금 계통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놀랍고 획기적인 결과였다.

재료의 물성은 크게 향상됐다. 다른 기계적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고 충격인성을 300% 이상 증가시켰다(관통력이 300% 늘었다는 뜻은 아니다). 연구팀은 이를 다단열처리(cyclic heat - treatment) 기술이라고 이름지었다. 세계 최초의 기술이며, 이를 바탕으로 국과연의 텅스텐 중합금 관통자의 재료기술 연구는 세계적 수준에 이르게 됐다.

“사실 열처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통설에도 불구하고 최초 풍산에서 반복 열처리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만의 공정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복합재료에서는 원소마다 열팽창계수가 다르기 때문에 물성의 저하를 가져오는 단점이 있는데, 저희한테는 이것이 장점으로 바뀐 겁니다.”(노박사)

다시 말하면 텅스텐 입자의 열팽창계수는 니켈·철로 된 기지상의 열팽창계수보다 4배 이상 크다. 때문에 중합금을 가열하면 텅스텐 입자가 크게 확장하면서 조직이 조금 약화되고 텅스텐보다 느린 속도로 늘어나는 기지상의 성분이 텅스텐 계면으로 파고들게 된다. 이때 갑자기 냉각하게 되면 텅스텐 조직은 빠른 속도로 원상태로 돌아오지만 회복속도가 느린 기지상 성분 일부는 텅스텐 계면 사이에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연구팀은 지렁이와 같은 계면 현상 발견부터 다단열처리 기술에 이르기까지 연구결과를 국제 학술지에 발표, 크게 주목받았으며 이 역시 국내는 물론 미국·일본 등지에서 특허를 획득했다.

“최초에는 사소한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소홀히 하고 지나쳤더라면 다단열처리라는 진주는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연구자는 아무리 사소한 실험결과라고 해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꼼꼼히 따져보고 그 원인을 분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백운형 박사)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