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스텐 중합금 관통자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점점 쇠퇴해갔다. 기존 텅스텐 중합금 관통자의 성능 향상 연구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탓인지 이 분야에 대해 심드렁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관심만 유지한 채 대부분의 연구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2000년 9월24일 한·미 자료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백운형·노준웅·홍문희 박사 등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팀이 새로 개발한 ‘미세조직 제어기술’을 일부 발표할 때만 해도 그렇게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백박사는 새 관통자 소재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성능평가와 검증을 미국에서 직접 수행해보고 싶었으나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데다 미국으로부터 동의를 얻기도 어려워 포기했다.

그런데 국과연이 열화우라늄 관통자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닌 텅스텐 중합금 관통자를 개발했다고 공식발표하고 그 모델을 국방과학관에 전시한 뒤 3개월여가 지난 2001년 늦가을, 미 육군 물자사령부(AMC)의 리너터 프라이스(Renata F Price)연구개발국장이 한국 방문의 바쁜 일정 중 2시간의 틈을 내 헬기를 타고 국과연을 찾았다.

미 육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의 연구·조달에 영향력 있는 인사로 알려진 프라이스 국장의 국과연 방문은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그녀를 맞이한 백박사도 영문을 잘 몰랐다. 백박사는 1시간에 걸쳐 연구팀이 개발한 관통자 소재 전반에 걸쳐 브리핑을 했다.

백박사는 그녀의 방문을 얼핏 이해하고 있었으나 이를 확실히 알게 된 것은 2002년 2월 말 미 육군연구소(ARL)의 재료기술분야 책임관인 로버트 다우딩(Robert Dowding)이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나서였다. 다우딩은 이 편지에서 국과연이 개발한 새로운 관통자를 미국에서 직접 시험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것은 미국 측의 분명한 변화였다. 그 이유는 코소보 전쟁 등에 참전한 군인들에게서 나타난 이른바 ‘벌컨 신드롬’에서 찾을 수 있다.

2001년을 전후로 미국 내외의 언론과 비정부기구(NGO)들이 벌컨 신드롬의 원인으로 열화우라늄탄을 지목하며 비난의 공세를 퍼붓자 미국은 벌컨 신드롬과 열화우라늄탄과의 상관관계를 부인하면서 한편으로는 열화우라늄탄을 대체하기 위해 수백 만 달러를 쏟아붓는 텅스텐 중합금 관련 대형 연구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세계 최고수준의 뚜렷한 연구성과를 거둔 한국의 국과연에서 그 해법을 찾고자 했던 것이고 이런 관심은 점차 확대돼 갔다.

최근에는 미 공군 산하 에글린(Eglin)연구소의 시라코스키(Sirakowsky)대표연구위원을 비롯한 연구원 13명이 국과연을 방문, 관통자 소재연구팀에서 연구개발 과정과 시험평가 결과를 청취한 바 있다.

다우딩과의 협의는 계속됐다. 그들은 최초 관통자 1발 시험에 2만5000달러나 드는 시스템 평가를 위해 정식 규격의 관통자 20개를 요구해왔다. 백박사는 2년 전 미국에서 시험하려다 포기했던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많은 돈을 주고도 할 수 없었던 시험을 미국이 자청해 무상으로 하겠다는 제안이다. 당장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결국 텅스텐 중합금 소재와 관련된 한·미 협력문제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 산하 방산기술협력위원회(DTICC)와 기술협력소위원회(TCSC)에 상정됐다. 미국 측은 한국에서 소재를 빌려주면(loan) 대가로 시험평가한 결과를 통보해 주겠다고 제의해왔다. 이는 우리의 관통자 소재를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도 되지만 이에 만족하며 수용할 수는 없었다. 백박사는 국방부와 협의를 가진 뒤 미국의 대외 비교 테스트(Foreign Comparative Test) 프로그램에 적용해 줄 것을 제안했다. FCT 프로그램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개발한 물자가 미국의 개발요구 조건에 충족할 때 이를 구매하는 제도다.

기술력 우위를 바탕으로 당당히 제시한 백박사의 제안은 다시 말하면 ‘시험용 소재는 빌려 줄테니 쓸 만하다고 판단되면 시간 끌지 말고 현물로 사가라’는 뜻이다. 미국 측과의 협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아직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기술력에 상응하는 대가와 자긍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돌이켜보건대 국과연 연구팀이 저예산, 소수의 연구인력임에도 불구하고 열화우라늄탄에 버금가는 최고의 관통력을 낼 수 있는 텅스텐 중합금 관통자 소재를 성공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던 까닭은 우선 연구원마다 10년 이상 외길을 걷듯 이 분야 연구에 몰두해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 연구팀 내부적으로 단결력과 팀워크를 탄탄히 다지는 가운데 일부 성과에 그치지 않고 최고 기술을 향해 굳은 도전의지로 연구과제를 계속 도출하고 확대해온 점,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이룬 점 등을 들 수 있다.

최근 국방획득의 패러다임이 외국 도입에서 국내 개발 및 핵심기술 축적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핵심기술은 ‘체계’와 달리 그 성과가 즉시 어떤 제품으로 나타나지 않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핵심기술 자체를 ‘핵심전력’(체계)으로 간주하는 자세를 갖는 등 적극적인 인식전환과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텅스텐 중합금 관통자 소재 같은 세계가 주목하고 탐내는 최고의 기술이 연이어 개발되지 않을까.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