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 연구팀은 개념설계 내용을 해군본부에 전하고 이를 검토, 그 결과를 1978년 12월31일까지 회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함께 돌고래 시작함(試作艦) 1척을 건조하고 시험평가하는 데 소요될 예산을 해군 계획에 반영토록 하기 위한 세부 예산 내역서를 작성, 역시 해군본부에 송부했다.

그런데 무릇 사업을 원만히 진행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돼야 하는 것이 예산, 즉 돈이다. 어찌 보면 사업진행에 있어 연구인력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돈일 수도 있다. 연구팀에도 이제 시작함 건조를 위한 예산 확보가 중요했다. 하지만 과학자로서 연구팀은 이런 부분에 취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업책임자 김영수 박사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작함 건조를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예산이 소요됩니다. 이 예산을 해군에서 확보해 줄 것을 수 차례에 걸쳐 건의했지만 예산 반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지요. 차선책이랄 수 있는데 이미 계획된 우리 국방과학연구소(국과연)의 연구개발 예산 가운데 일부를 돌고래 시작함 건조예산으로 할애해 충당하는 방안도 강구했습니다.”(김영수 박사)

해군에서 예산을 확보하는 경우든, 국과연의 예산 일부를 돌고래 쪽으로 돌리는 경우든 국과연 연구소장과 국방부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김박사는 먼저 예산을 4개년에 걸쳐 연차적으로 소요되게 편성, 예산 관련 부서에서 큰 부담을 갖지 않도록 계획했다. 무엇보다 국과연 지휘부에 대해 돌고래 개발이 기술적으로 위험 부담이 없으며 국과연 자체기술로 개발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고래가 군이 요구하는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며 자체개발로 얻어지는 파급 효과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국과연 지휘부와 해군, 그리고 합참과 국방부의 관계 부서에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당시 진해기계창(진해연구소의 위장 명칭) 창장이었던 서정욱 박사가 김박사를 불러 묘책을 제시해 주었다. 후에 국방과학연구소장을 거쳐 과학기술부장관을 역임한 서박사는 과학자로서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사업자적 경영관리 역량 또한 뛰어났다.

“서박사님께서 그때 영업사원이 제품을 팔기 위해 세일(sale)활동을 하듯 연구과제를 세일해야 한다며 과제 세일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조언하셨는데, 특히 시각적으로 관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유해 주셨습니다. 그중 슬라이드를 활용하라는 것은 당시 문서에 익숙한 연구팀에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파워 포인트로 쉽게 작성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도구가 없었지요.”(김영수 박사)

연구팀은 곧바로 한자리에 모여 최고급·최양질의 슬라이드를 만들기로 하고 온갖 아이디어를 모았다. 개념설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구상하고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자, 기왕이면 색깔을 넣어 컬러화하자 는 등의 제안이 나왔다.

문구점으로 달려가 물감을 사는 등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참신한 맛이 나지 않았다. 복잡하지 않으면서 간단하게 말하고 싶은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고 도안을 만들어 가는 중에 슬라이드를 제작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팀은 수소문 끝에 우리나라에서 슬라이드 제작을 제일 잘하는 곳이 서울의 ‘신영사’라는 것을 알고 샘플을 의뢰했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의 슬라이드가 보내져 왔다. 시나리오 초고(草稿)에 있는 연구팀의 생각을 제작사에 정확히 전달하는 일도 큰일이었다. 임경식 연구원이 진해와 서울 제작사를 수 차례 오가며 슬라이드 내용을 수정·보완해 완성했다.

컬러 슬라이드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자체 시연회와 국과연 지휘부는 물론 해군본부 체계분석실에서 가진 돌고래 설명회에서 모두들 깜짝 놀랐다. 슬라이드가 너무나 선명한 데다 내용이 쉽고 설득력 있게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진해 촌놈들이 어떻게 이런 훌륭한 슬라이드를 만들었을까 하고 놀라는 모습에 이런 것이 충격요법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기선을 제압했다는 듯 어깨를 쭉 펴며 돌고래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 주었습니다.”(김흥열 박사)

하지만 문제는 점심식사 후 해군참모총장에게 슬라이드를 보여 줄 때 생겼다. 첫 장면 슬라이드가 거꾸로 나오지 않는가. 이게 웬일일까. 김흥열 연구원은 당혹스러웠지만 슬라이드를 얼른 빼내 다시 돌려 넣었다. 화면은 바로 됐지만 돌고래도 이런 식으로 만들지 않겠나 여길 것 같아 앞이 캄캄했다. 나중에 원인을 알아보니 해군본부 체계분석실 관계자가 점심 식사 시간 동안 신기하다며 슬라이드를 빼내 본 후 거꾸로 삽입한 것이었다. 다행히 해군참모총장 및 참모들은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다만 누구 돈으로 돌고래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해군은 돈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