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과학연구소의 항공전자팀이 갑작스럽게 저속통제기 개발 사업에 투입돼 긴급 임무를 부여받게 된 것은 2.75인치 로켓의 사격 통제를 위해 저속통제기에 전방 시현기(HUD)를 장착하기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HUD를 운용하는 데에는 정보 처리와 그래픽을 생성하는 컴퓨터, 즉 임무 컴퓨터라고도 불리는 항공 전자 컴퓨터(ASC： Avionics System Computer)를 필요로 한다.

HUD를 비롯한 대부분의 항공기 전자 장비는 요구 조건에 맞는 부품을 구매해 활용할 수 있으나 이 ASC는 항공기의 임무와 탑재 시스템의 형상에 따라 고유한 특성을 갖게 마련이어서 반드시 항공기와 함께 새로 개발돼야 한다.

항공전자팀은 1990년대 초 KTX-2 고등훈련기(해설 참조)를 탐색 개발할 때 첨단 항공기의 필수 요소로 인식된 ASC를 개발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이후에도 자체적으로 꾸준히 연구해 왔다.

하지만 이 기술들을 실제 적용할 시기가 이렇게 긴급히 다가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연구팀은 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먼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ASC의 프로세서로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당시 군용 내장형 컴퓨터에 널리 채택되고 있던 인텔사의 i960 32비트 프로세서를 활용한 ASC 연구 시제품을 자체 개발한 상태에서 다음 세대 칩으로 꼽히는 IBM·모토롤라의 파워 PC 계열 프로세서로 전환하려던 시기였다.

그러나 프로세서를 변경하면 하드웨어 설계부터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에 이르는 모든 개발 환경을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개발자가 사용에 익숙해지기까지 기간이 소요되게 마련.

ASC 개발에 할애된 기간은 2년 6개월 정도. 이 기간 안에 환경 시험을 마친 시제품에 소프트웨어까지 탑재, 초도 비행 시험 준비까지 마쳐야 했다.

ASC에 대한 요구 성능·일정·개발에 따르는 위험 요소 등을 검토한 연구팀은 저속통제기에는 i960 프로세서가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칩을 확보하기 위해 서둘렀는데 뜻밖에 복병이 나타났다. 군용 환경을 충족하는 버전이 생산 중단되고 상용 칩만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군용 모토롤라 계열 칩이냐, 아니면 상용 버전의 인텔 칩을 사용하되 컴퓨터 내의 방열 조건을 개선하느냐로 고심을 거듭했다. 여기에 고민거리 하나가 더해졌다.

“냉각 공기를 유입할 수 없는 위치에 장착되는 컴퓨터에 프로세서는 4개, 전자회로 기판 모듈이 10장이나 장착되는 ASC의 내부 온도를 낮게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져 드는 느낌이었죠”(이성수 팀장)

그래도 역시 뜻이 있으면 길은 있는 법.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관련 자료를 찾고 또 연구실 한쪽에 쌓인 데이터 북을 뒤지는 여정을 계속하던 중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i960 프로세서 버전을 발견했다. 바로 온도 확장 버전이었다. 군용 칩은 아니지만 산업용으로 동작 온도를 확장한 것으로 ASC의 방열 설계만 제대로 하면 충분할 듯싶었다.

연구팀은 이제 기존 연구 시제품 수준에서 항공기 탑재용으로 발전시키는 단계에 들어섰고 이때 ASC의 개발이라는 길을 일사천리로 내달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통제기의 임무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항공 전자 시스템을 정의·설계하고 이로부터 ASC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OFP： Operational Flight Program) 요구 분석과 설계·제작·시험 과정이 착착 진행됐다.

시제 업체인 LG이노텍(현 넥스원 퓨처)과 업무 분장을 통해 효과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한 가운데 데이터 처리, 항법·무장 조준 알고리즘 계산 등을 위한 시스템 프로세서, 전방 시현기와 두 대의 다기능 시현기용 그래픽 발생기, 외부 인터페이스를 위한 통신·신호 입출력기 등으로 모듈화해 전자회로를 설계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의 인터페이스를 효율적으로 구현하는 중간 계층의 펌웨어도 개발했다. 단기간에, 그것도 한 번의 시제로 개발을 완료하는 일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ASC 하드웨어와 병행 개발해야 하는 내장 소프트웨어인 OFP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능 역할을 하는 OFP가 없다면 ASC 하드웨어는 그저 쇳덩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예산 부족으로 외부 협력 업체를 활용할 수도 없는 상황. 편리하고 강력한 소프트웨어 개발 환경이 필요했다.

i960 프로세서에 쓰이는 컴퓨터 언어는 Ada 랭귀지(language). 기존 연구 시제 OFP 결과물을 활용해 저속통제기용 OFP로 수정 개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언어는 신뢰도가 높지만 가격 또한 높았기 때문에 군용 시장에서도 컴파일러(compiler ：고급 언어로 쓰여진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즉시 실행될 수 있는 형태로 바꿔 주는 번역 프로그램)가 다양하지 못했고 공급하는 회사도 적었다. 대부분이 사용하기 불편한 유닉스(UNIX) 기반의 개발 환경을 공급할 뿐이었다.

겨우 찾아낸 회사가 미국의 어빈(Irvin)사였다. 유일한 회사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컴파일러가 도입돼 PC 환경에서 OFP를 개발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에러가 잦았다. 이 회사도 유닉스 버전을 PC 버전으로 변경, 그것도 이 PC 버전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팀에 처음으로 판매한 탓에 컴파일러는 안정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임흥식 연구원이 애를 많이 썼지요. 새로운 컴파일러의 문제점을 빨리 파악, 대처해야 했는데 인터넷으로 몇 달 동안 수 차례에 걸쳐 업데이트용 패치 파일을 받아 가며 기능을 안정화했습니다. 어빈사는 컴파일러를 검증해 준 우리에게 감사해야 할 거예요.”(이성수 팀장)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