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초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아직 서울 홍릉에 자리해 있던 시기.

해군과 관련된 무기 체계를 연구개발하는, 당시에는 ‘6부 2실’이라 불리고 현 2체계연구개발본부의 모체가 되는 함정·해상무기체계연구실 실장 박철희(朴喆熙·현 인하대 명예교수·72) 박사는 국방부를 다녀오면서 굳은 표정을 보였다.

박실장은 신음을 토하듯 들릴 듯 말 듯하게 무슨 말을 읊조리다 이내 연구원들을 불러 모았다. 연구원이라고 해야 실장인 그를 제외하고는 송준태(宋俊泰·책임연구원·2체계연구개발본부장 역임·59), 해군에서 파견된 이준수(李俊秀·57) 중위와 한재구(韓在九·57) 중위 등 단 세 명.

당시 체계분석실장을 겸직하고 있던 박실장은 국방부에서 전력 증강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성명·직함 미상)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았다. 박실장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상부의 ‘강력한 지시’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어뢰였다. 수중에서 일정 수심을 유지하며 일정 거리를 곧바로 항주하는, 즉 무유도(無誘導) 직진 어뢰를 국내 기술로 개발·제작하라는 것이었다.

‘어뢰라니….’

1956년 해군사관학교(10기)를 졸업하고 미국 해군대학원과 버클리대(공학 박사)를 이수한 박실장은 어뢰라는 것이 어떤 무기 체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해군사관학교 교수와 해군본부 연구위원회 연구관을 거쳐 70년 8월부터 ADD 창설 요원으로 몸담아 온 만큼 ADD의 연구개발 환경, 산업체의 기술 수준도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준의 무유도 직진 어뢰라고는 하지만 어뢰 개발이란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어려운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임무를 부여받은 박실장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ADD는 창설 초기 기본 요원만으로 구성했다가 1년여가 지난 71년 중반기에 들어서야 전문 분야별로 연구원을 확보하면서 연구개발 업무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본격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물론 소총·박격포 등 기본 병기 개발을 위한 ‘번개 사업’이 71년 11월부터 시작돼 이듬해 4월 종합 사격시험 시범까지 보일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의해 단행된 것으로 착수 시기도 ADD가 당시 기본 병기 개발에 들어가리라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랐을 만큼 특별한 것이었다.

함정·해상 무기 체계 분야도 양창주(작고·‘해룡’ 대함 유도탄 개발 책임자 역임), 송준태 연구원이 71년 5월 연구원으로 입소하면서부터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던 터였다.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장차 개발할 무기 체계의 로드맵을 구상하면서 첫 수행 과제로 선박·함정 설계를 위한 시험 시설인 대형 수조시험 시설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것과 대간첩 작전용으로 30톤급 고속정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조시험 시설 계획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조선해양연구실(당시 실장 김훈철 박사·ADD 초대 2체계연구개발본부장 역임)에 의해 72년 선박 연구소 설립이 본격 추진되면서 중단됐다.

30톤급 고속정 개발 업무는 당시 선박 설계의 국내 최고 권위자였던 서울대 조선공학과 김재근 교수의 지도에 힘입어 상당 부분 진척됐으나 이 역시 국방부의 함정 개발 건조 업무 일원화 정책에 따라 해군본부 조함과로 이관됐다.

이후 ADD의 함정·해상 무기 체계 분야 연구는 국내에서 개발 건조된 함정의 성능시험 평가를 전담하게 됐는데 번개 사업 시작에 따라 양창주 연구원은 총기개발실(실장 김성진 박사)로, 송준태 연구원은 기동장비개발실(실장 이한백 박사)로 소속이 변경돼 기본 병기 개발 사업을 수행하게 됐다.

이로 인해 함정·해상 무기 체계 분야에 주어진 업무는 73년 초 현천호(ADD 부소장 역임) 박사가 연구실장으로 부임한 후 송준태 연구원이 복귀하고 이준수 중위 등이 해군에서 파견돼 온 후에야 정상화됐다.

이때 연구원들은 해군본부 조함과가 개발 건조한 70톤급 고속정 학생호(PBK-1)와 30톤급 고속정(FB)에 대한 해상 성능시험 평가를 미 해군 연구소(NSRDC)에서 파견된 전문가의 기술 지도와 장비 지원 아래 국내 처음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함정 성능시험 평가 과제가 계획대로 완료되자 74년 초 현천호 박사는 전공 분야인 사격통제연구실을 새로 만들어 연구실을 떠나게 됐다. 당시 연구소 측에서는 연구실의 존폐까지 검토했으나 연구원 수가 적더라도 함정·해상 무기 체계 연구는 계속해야 한다고 판단, 체계분석실장이던 박철희 박사가 함정·해상무기체계연구실장 업무를 다시 겸직하게 됐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다시 당시 상황을 보면 번개 사업에서 알 수 있듯이 소총·박격포 등 기본 병기조차 실물을 분해해 제작 도면을 작성하고 때로는 수작업으로 가공 정밀도를 높여 가며 시제품을 제작하던 때였다. 기계공업 분야에서 재봉틀을 생산하는 공장이 가장 정밀도가 높은 기계 가공 기술을 보유하고, 전자공업 분야에서는 냉장고·흑백 TV의 생산 공장이 가장 첨단 수준의 전자 기술을 상징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면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번개 사업의 성공은 ADD 연구원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함께 국가가 요구하면 꼭 수행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됐다. 또 산업체도 특별 융자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받기 위해 방산 분야에 진출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다.

국내 최초의 어뢰 개발 사업은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됐다. 박실장과 송준태 연구원 등은 무유도 직진 어뢰 개발 지시가 수행하기 어렵고 한편으로 황당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해 보자’는 도전적인 자세를 내보이며 첫걸음을 내디뎠다.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