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itary Review - (주)아이엠알코리아　　　　　　　　　　　　　　　　　　　　　　　　　　　　　　　　　　　　　　　　　　　　　　　　　　　

사진으로 보는 광복 60년 (18) 흑백TV 시대의 스포츠

이른 저녁식사를 끝내고 사람들은 프로 레슬링 경기 시각에 맞춰 동네에 몇 안 되는 흑백TV가 있는 집으로 모여든다.

경기 초반 험악한 모습의 외국 선수들은 야비한 반칙을 써가며 우리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몰아 부친다. 뻔히 눈에 보이는 반칙인데도 얄미운 심판은 꼭 나중에야 알아채고 김일, 천규덕 선수의 얼굴엔 피가 흐른다. TV앞 관객들은 “이를 어쩌나…”하는 탄식과 함께 안절부절 못한다.

그러나 이도 잠시, 마침내 김일 선수의 박치기가 터지고 혼비백산한 상대 선수는 연이은 드롭킥에 매트 위로 쓰러지고 만다. 하나, 둘, 셋… 심판의 매트를 내치는 손바닥 소리에 맞춰 온 국민이 카운트를 하고 코흘리개 꼬마에서 아저씨까지 환호성을 지른다. 상대가 일본 선수라도 되는 날이면 울분을 식히듯 환호는 더했다.

다음날 초등학교의 쉬는 시간에도 어제 밤 레슬링 시합의 화제는 이어지고 경기를 못 본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왕따’가 될 수 밖에 없다.

60~70년대 프로 레슬링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입니다.”

밤 늦은 시각 또 온 국민들은 잡음 가득한 라디오 속 동남아시아 어디에 있는 나라에서 열리는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의 경기 중계에 귀를 기울였다.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배, 태국의 킹스컵은 한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 축구대회 였다. 지금이야 한국이 일본과 함께 아시아 축구 최강국이지만 당시는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등도 홈 경기에서만큼은 한국 축구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축구는 중요한 고비에서 이들 나라에 발목을 잡히곤 했고 특히 비가 많은 나라의 원정 수중전에 약했다.

70년대는 고교야구 전성기다. 지역 예선을 거쳐 고장을 대표하는 학교가 출전, 서울운동장(지금은 동대문 야구장)에서 열린 전국대회는 예선에서 결승까지 거의 매회 3만 관중을 불러 모았다.

프로 복싱도 인기였다.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매치에서 도전자 김기수는 예상 밖의 분전으로 이탈리아의 참피언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처음으로 세계 타이틀을 차지했다.

84년 LA올림픽 이후 한국은 명실상부한 스포츠 선진국이 되었지만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 수십만 환영 인파가 몰리는 카페레이드를 펼칠 정도로 국가적 경사였다.

한국 선수가 당당히 주전으로 뛰는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와 유럽 축구 챔피언스리그를 생중계하는 시대, 남녀노소 흑백TV 앞에 한데 모여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고 라디오 중계에 손에 땀을 쥐던 그 때 그 시절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