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초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산동의 정영근씨 집에서 중요한 갑옷 하나가 발견됐다.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그 갑옷은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경렬공(景烈公) 정지(鄭地·1347∼91년)장군의 갑옷(사진)으로 밝혀졌다.

당시 전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려시대의 갑옷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땅속에 매장되면 장기간 보존되는 경우도 있으나 후손이 대대손손 갑옷을 전해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전세품(傳世品) 갑옷은 기껏해야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며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까지의 갑옷 중에 전해 오는 것은 정지 장군의 것이 유일하다. 정지 장군의 사망시점부터 계산해도 무려 613년 전의 갑옷인 것이다.

이강칠 전 육군박물관장은 정지 장군의 갑옷에 대해 “약 600년 전의 갑옷이 매장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손을 통해 전해 왔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또 갑옷의 착용자가 전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갑옷의 가치는 더욱 높다.

갑옷의 주인인 정지 장군은 1374년 수군(水軍) 창설을 공민왕에게 건의한 장본인이며, 그 이후 전라도 안무사(全羅道 按撫使), 전라도 순무사(全羅道 巡撫使)를 역임하며 전라도 일대에서 왜구 격퇴에 큰 공헌을 했다. 1381년에는 왜구 토벌 공로로 해도원수(海道元帥)에 임명됐다.

특히 정지 장군은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 토벌전의 4대 대첩 중 하나로 손꼽히는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을 이끌어 낸 주인공이다.

관음포대첩이란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음포 앞바다에서 1383년 5월(고려 우왕 9년) 정지 장군이 47척의 함대로 왜구 함대 120척을 대파한 전투다. 관음포대첩은 최무선 장군이 개발한 화약무기를 해전에서 사용한 최초의 전투였으며 육지가 아닌 해상에서 왜구를 격멸한 대표적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 당국은 1960년 1월20일 이 갑옷의 중요성을 감안, 보물 제336호로 지정했다.

정지 장군의 갑옷은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시대의 갑옷과는 모양새가 다르다. 쇠로 만든 갑옷 미늘(鐵札)을 쇠고리(鐵環)를 이용해 연결했는데 이런 방식의 갑옷을 경번갑(鏡幡甲)이라고 부른다.

경번갑은 강한 방호력을 지니면서 몸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갑옷의 규격은 길이 70㎝·가슴둘레 79㎝·소매길이 30㎝다. 갑옷 미늘은 세로 7.5∼8㎝·가로 5∼8.5㎝ 정도의 크기인데 철판 구멍을 뚫어 쇠고리로 연결했다. 현재 진품은 광주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전쟁기념관에도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2.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