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수많은 장군이 거쳐 간, 그 유성이 흘러간 자리에는 어디나 그들의 흔적이 비(碑)·탑(塔)으로 남아 있다. 전투하는 와중에 자신의 전적비를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많은 전적비 속에 등장하는 별들의 이름은 후임들이 세워 기리는 것이다. 송덕비·공덕비도 남이 세워 주는 것이다.

누가 장군의 송덕과 공덕을 기려 주는 것일까. 전선에는 군인만 살지 않는다. 그 옛날 수복지구가 개척되는 모습을 보면 늘 두 단계를 거쳤다. 일단 군인이 주둔하면 그 지역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 된다. 그 땅으로 그곳에 고향을 뒀거나 파라다이스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군인과 민간인은 먼발치에서 살았지만 남남처럼 지내지 않았다. 군인은 길을 내주거나 다리를 놓아 주었으며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 주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곳곳에 송덕비·공덕비가 세워진 것이다.

1954년 1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향로봉 기슭에는 밤새 2m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 한 고지의 낡은 막사가 무너지면서 59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2년 후 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고 박정희 대통령)준장은 그 설화(雪禍)가 마음 아팠던 모양이다. 그는 들판 한가운데 솟은 당봉에 ‘嶺東地區 丙申 雪禍殉職將兵 忠魂碑’를 친필로 써 세웠다. 지금 비무장지대(DMZ)를 따라 곳곳에 돌보는 이 없이 풀밭에 나뒹구는 수많은 ‘별들의 유적’은 모두 그렇게 의미를 담고 세워진 것들이다.

‘병(兵)들의 유적’은 없는 걸까. 그러나 그 많은 병사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 업적을 기리기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DMZ 일대를 여행하면서 그 불가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병장의 비’는 물론 ‘상병의 비’도 발견했다. 아무리 ‘명예는 상관에게, 공은 부하에게’라고 한다지만 이 나라 군인들의 너무 아름답고 숭고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는 두 병사의 비에 거수경례를 했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 수피령 고개 중턱에 ‘병장 김수현 충혼비’가 있다.

그는 50연대 수색중대원이었다. 64년 11월14일 자정쯤 순찰 중이던 그는 2명의 무장간첩과 조우했다. 한 명을 사살한 그는 부상을 입고 도주하는 다른 한 명을 뒤쫓다가 총격을 받고 전사했다. 73년 6월, 바로 그가 전사한 그 자리에 충혼비가 세워졌다.

석축 기단 위에 높이 3m, 폭 1.2m짜리 화강암석에는 ‘나를 버려 나라를 구하고 목숨을 던져 조국을 수호하는 군인의 길. 그것은 정녕 한 인간이 그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공헌인 것이다’라는 글이 음각됐다.

경남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출신의 한 청년은 그렇게 귀감이 돼 빛나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 속칭 수무정의 ‘상병의 비’는 아버지가 세운 눈물의 비석이다.

포병 황성연 상병은 69년 12월 트럭 전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문제의 S자 급커브길에 놓인 좁은 다리, 그 사고 다발지역에서 포차가 추락한 것이다. 부친 황덕상씨는 아들의 한을 달래 주기로 했다. 사재를 털어 굽은 도로를 펴고 다리를 넓혀 ‘성연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내 아들 통일을 위한 맹훈련 중에 그 뜻을 못다 하고 이 굽은 길 녘에서 순직하니 이를 바로잡아 모든 이 쉬어 가고 그 넋을 위로하며 통일의 염원으로 이 다리를 나라에 바치노라’.

절규하듯 아버지의 목소리가 새겨져 있던 작은 화강암 비석은 지금 그곳에 없다. 30년 전 ‘성연교’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 비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 가슴속에 새겨져 있을 게 틀림없다.

< 함광복 강원도민일보 논설위원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3.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