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일대에는 궁예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 일대를 지배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포천·철원 일대의 산성에는 궁예와 관련된 전설이 아직까지 민간에 전해지고 있는데 운악산성·성동리산성·반월산성·보개산성·명성산성 등이 그 대표적인 산성들이다.

육군박물관은 1995년 경기도 연천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성동리산성·보개산성을 조사했으며 96년에는 철원 지역 지표조사를 통해 명성산성을 조사했다. 97년에는 포천에 대한 지표조사 중 반월산성·운악산성을 조사했다. 당시 국방유적 조사 결과 보개산성·명성산성이 궁예와 관련된 산성임이 밝혀졌으나 다른 산성들은 궁예와의 관련성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경기도 포천군 향토유적 제36호로 지정된 보개산성(寶蓋山城)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포천군 관인면에 속해 있지만 1906년 이전까지는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었다.

산성이 위치한 보개산은 추가령지구대와 철원평야를 갈라 놓은 험준한 산으로 개성이나 경주에서 철원에 이르려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지리적 요충지다. 보개산은 해발 877m의 지장봉을 비롯해 500m가 넘는 여러 개의 높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보개산성은 이런 봉우리들을 연결해 동쪽으로는 30~40m의 수직 암벽 능선을 천연적인 성벽으로 삼고, 서쪽의 낮은 계곡과 남북의 능선에는 돌로 성벽을 쌓은 전체 길이 4㎞에 이르는 비교적 큰 산성이다. 성벽은 모두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한 돌로 쌓였는데 대부분 무너져 내려 온전히 남아 있는 부분은 10여 군데로 그 길이는 모두 합해 70여m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서쪽 계곡 쪽에 견고한 성벽이 세 군데 잘 남아 있는데 성벽이 가장 높은 곳은 5.6m에 이른다.

보개산성은 몇 개의 계곡과 산 정상의 봉우리를 연결해 축조된 산성으로 우리나라의 다른 산성들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산성의 규모는 매우 크지만 성 내부는 모두 가파른 경사지로 돼 있어 단 두 군데의 좁은 건물터만 발견됐다. 산성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내부에 상당수의 군사가 상당기간 저항할 수 있는 군량미를 비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보개산성에는 그럴 만한 지형을 찾을 수 없었다.

명성산성(鳴聲山城)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철원평야의 남단에 우뚝 서 있는 해발 923m의 명성산 일대에 축조돼 있다.

육군박물관의 지표조사 이전에는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어 ‘철원군지’에도 길이 70m의 작은 성으로 소개돼 있으나 육군박물관의 조사에서 길이 2㎞의 큰 산성임이 밝혀졌다.

명성산성은 명성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해발 870m의 봉우리와 그 좌측의 823m 봉우리(일명 시루봉)를 둘러 서북쪽으로 뻗어 있는 두 능선을 따라 밑으로 내려오다 해발 65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가운데 계곡으로 내려와 서로 만나고 있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양면을 잘 다듬은 비교적 작은 판석으로 성벽의 높이는 3m 정도였으나 대부분 붕괴돼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보개산성과 명성산성은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연해 축성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성벽이 없다 해도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고 내부에 대규모의 건물을 지을 터도 없는 그야말로 험준한 산속에 길이 수km에 이르는 큰 산성이 축조됐던 것이다.

이들 산성은 전설이 아니더라도 궁예에 의해 축조됐음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이들 산성의 위치가 철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점,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국방상 중요했던 시기는 궁예 외에 별로 없었다는 점, 그리고 산성 내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들의 추정 시기가 신라 말이라는 점 등은 이들 산성이 궁예에 의해 축조됐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궁예는 왕건에게 쫓겨 산림(山林)에 들어가 암곡(巖谷)에 숨었다가 부양(斧壤·오늘날의 평강) 사람에게 죽었다’고 한다. 보개산성과 명성산성은 바로 암곡으로 이루어진 산성으로 궁예가 왕건에게 대항했던 최후의 장소가 바로 이 두 산성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산성은 그동안 보존·관리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다.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재 당국은 이들 산성의 보존·관리를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기를 기대한다.

〈이현수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교수· 육군박물관장〉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3.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