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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원치 않았던 전쟁의 시작과 끝

제1차세계대전사 <존 키건 지음/청어람미디어>

저자와 주제만으로 책 선택이 가능할 때가 있다. 존 키건의 ‘제1차세계대전사’가 그렇다. 존 키건이 누구인가.

세부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팩트의 정확성 면에서는 다소 의심을 받을 때도 없지 않지만 전쟁을 바라보는 존 키건의 선 굵은 관점에 대해선 그 누구도 토를 달긴 쉽지 않다.

20년 동안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의 전사 교관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데일리 텔리그라프지의 국방부분 대기자까지 지낸 존 키건은 수많은 전쟁사 서적으로 영미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차원에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전문 전쟁사 연구가다.

존 키건은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을 모두 단행본으로 펴낸 경력이 있지만 두 책 중에는 그래도 1998년에 집필한 제1차세계대전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존 키건의 제2차세계대전을 국내에 번역한 적이 있는 청어람미디어에서 이번에 제1차세계대전사까지 번역함에 따라 그의 전쟁사 단행본 목록 중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또 한 권 추가됐다.

이번에 번역된 제1차세계대전은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때로는 현장에서 지켜본 사람처럼 미시적으로, 때로는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을 관조하듯이 선 굵게 제1차세계대전의 거대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주무르는 키건의 솜씨는 전문작가 못지 않다.

제1차세계대전은 안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전쟁이다. 언뜻 전쟁의 전개과정이 제2차세계대전에 비해 극단적으로 정적인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전술적 교훈을 발견하기 힘들 만큼 비극적인 참호전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제1차세계대전의 전부는 아니다.

전쟁 전 동원과정, 전쟁계획의 수립과정에서의 어려움, 고위 장교집단과 일반 병사들 간에 발생할 수 있는 괴리감, 전쟁 수행과정에서 동맹국의 역할 등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중요한 주제에 대한 생생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제1차세계대전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력과 기동의 상관관계, 통신이나 창의적 전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교과서적 교훈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제1차세계대전은 개전의 책임을 한 인물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제2차세계대전과는 그 시작부터 다르다. 그 누구도 세계대전을 원하지 않은 가운데 암살 사건에 대한 약간의 군사적 압박이 서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연결되고 에스컬레이터되면서 전쟁으로 번져 갔다.

상대방에 굴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국민들, 전쟁 방지 협의 과정에서 조금의 양보도 군사적으로 치명적인 손해를 촉발할 수 있다는 군의 두려움, 폭발 직전의 분위기 속에 제 역할을 못 해 전쟁 방지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외교관들의 무능, 강대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원하는 완고한 국가지도부가 합작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전쟁의 길로 폭주해 들어갔다.

존 키건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상당히 압축적인 필체로 거침없이 묘사해 내고 있다. 군 출신 전쟁사 연구가들은 작전의 전개과정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고, 정치학자들이나 대중작가들의 전쟁사는 전투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비해 키건의 제1차세계대전은 전쟁이라는 가장 격렬하고 격정적인 주제를 군사적인 측면에서나 그 외적인 측면에서나 다채로운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영국·프랑스가 참여한 서부전선을 부각시키고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동부전선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룬 점 등 저자의 국적에서 초래한 한계는 이번 저작에서도 어김없이 발견됐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의 개설서로서는 무리 없는 수작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문의 02-3143-4006

< 출처 : 국방일보 김병륜, 2009. 3. 12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9-03-12 19: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