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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역사’ 정묘·병자호란 비극 재조명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한명기 지음/푸른역사 펴냄>

1637년 1월 30일 오전 조선 국왕 인조는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삼궤구고두례’,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식과 함께 조선의 국가적 자존심은 산산조각났다.

항복 의식을 끝내고 인조가 서울로 돌아갈 때 만 명에 가까운 조선인 포로들이 울부짖었다. ‘왕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가슴 아픈 통곡에도 국왕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탈출한 포로들을 청나라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잡은 조선인 포로들이 도망쳐 조선에 돌아올 경우 반드시 송환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했다.

1674년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나 안단이라는 인물이 청나라에서 탈출해 압록강을 건넜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청나라의 추격대가 아니라 조선 지방 관료의 입국 거부 통고였다. 단순히 입국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를 잡아 청나라 측에 인도했다.

안단은 “늙을수록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는 울부짖음만 남긴 채 청으로 압송됐다.한명기 명지대 교수가 최근 펴낸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는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처 중 하나인 정묘·병자호란에 대한 연구서다. 이 책은 무참한 패배의 역사, 달리 표현하자면 고통스러운 실패의 역사를 다룬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지금까지 주로 연구해 온 16세기 말~17세기 초는 우리 역사에서 전쟁의 비극과 국제관계의 냉혹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대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정묘·병자호란의 격동기을 맞아 ‘조선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이 책을 집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질문에 직접적 답변을 하지는 않는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무거운 성찰의 소재를 던져줄 뿐 그 같은 고민에 대한 답은 독자에게 맡겼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저자는 청에 대해 끝까지 대항했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척화론적 시각이나 혹은 국력의 격차를 고려해 타협했어야 한다는 주화론적 시각 그 어디에도 명확한 지지의 방점을 찍지는 않는다. 그 같은 평면적인 접근보다 청이 어떤 필요에 의해 조선을 침략해야만 했는지, 조선이 복잡 미묘한 국제 상황 속에서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 구체적인 사실의 흐름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그 과정을 통해 저자가 조심스럽게 내리는 결론은 ‘당시 조선의 국가 지도부에 총론은 있었으나 각론이 없었다’는 것이다. 척화나 주화나 양쪽 모두 어느 쪽이 옳다는 방향성만 정했을 뿐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없었다는 지적이다. 이 책은 기존에 알려진 지식을 재확인하거나 구체화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좀 더 다른 각도로 정묘·병자호란을 바라볼 수 있게 돕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정묘호란은 조선의 태도에 상관없이 후금의 필요에 의해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분쟁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함으로써 당시 전쟁 발발 과정을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해 명나라나 조선 측 일부 관료들이 청나라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이용하려 했던 움직임도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국제관계의 복잡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혹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군사력이 청나라에 의해 어떻게 활용됐는지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조선 측이 지닌 잠재력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반대로 조선 측 지식인들 중 일부가 포로나 인질 체류 경험을 통해 청나라의 장점을 인식해 가는 과정을 통해 당시 조선이 가진 약점이 무엇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기도 한다.전투 과정 자체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주요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에 차분한 논조 속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실패의 역사를 되새김질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명분과 실리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상대적인 약소국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궁극적인 주제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그 같은 역사적 고민들이 반복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정묘·병자호란을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역사로 치부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의 02-720-8921

< 출처 : 국방일보 김병륜, 2009. 5. 15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9-05-15 19: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