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25년 10월25일, 평민들이 주력인 8000명의 영국군과 최정예 귀족 기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군 1만2000명이 프랑스의 아쟁쿠르에서 격돌했다. 싸워 보나 마나 승리는 이미 프랑스의 몫인 것처럼 보였다.

국왕 헨리 5세가 지휘하는 영국군에는 극소수의 기사만 포함돼 있었다. 그나마 병력 중 5000명은 근접 전투 능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궁수(弓手)였다. 더구나 프랑스에 상륙한 지 70여 일이 지난 영국군은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프랑스 기사들은 빛나는 갑옷을 뽐내며 영국군을 비웃는 듯 보였다. 프랑스군의 면모는 화려했다. 샤를 달브레를 총사령관으로 해 수많은 귀족이 참전했고 전위대 사령관 장 르 맹그르 원수는 숱한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뛰어난 장수였다. 이들은 두터운 갑옷과 멋진 말로 무장했다. 프랑스 기사들은 이 일방적인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명예를 드높이고자 아우성이었다.

3시간이 넘는 대치 상태를 먼저 깬 것은 영국군 궁수들이었다.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온 그들은 땅에 마방책(馬防柵)을 박고 장궁(長弓)을 빼들어 화살을 날렸다. 쏟아지는 화살은 기사들의 두터운 갑옷을 뚫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영국군 평민 궁수들을 얕보았던 프랑스 기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말을 몰아 적진으로 돌격을 시작했다. 그 뒤를 보병 무사들이 뒤따랐다. 지형과 공간, 전술적 운용을 고려하지 많은 무질서한 돌격이었다.

방책에 막혀 우왕좌왕하는 기사들은 말에서 떨어지거나 방향을 헤매면서 혼란에 빠졌다. 낙마한 기사들로 어지러운 좁은 진창에서 무거운 장비를 걸친 무사들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활을 내던지고 도끼와 칼을 집어 든 가벼운 옷차림의 영국군 궁수 5000명이 전장에 뛰어들자 프랑스군은 압도됐다. 진창에 나동그라진 프랑스 기사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는 잔인한 살육이 이어졌다.

전투의 결과는 프랑스에게 재앙이었다. 공작 3명, 백작 5명, 남작 90명을 비롯한 5000여 명의 귀족이 전사했고 1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영국군에 일방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흔히 당시 영국군이 승리한 이유가 장궁의 뛰어난 성능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학계의 연구 결과는 다르다. 당시 장궁이 강철 갑옷을 관통할 정도의 성능이 없다는 것.

모든 면에서 우세했던 프랑스군이 참패한 가장 큰 이유는 귀족 기사들의 엉성한 군기였다. 귀족 기사들은 전공에 눈이 어두워 통제된 지휘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돌격, 불리한 전장에 스스로 갇혀 버렸다. 기병이 적의 측면을 위협하고 정면에서 무사들이 석궁의 지원을 받으며 질서 정연하게 돌격한다는 프랑스군의 최초 작전 계획은 귀족 기사들의 무질서한 돌격 때문에 처음부터 엉망이 돼 버렸다.

아무리 유리한 형세를 선점하고 있는 군대라도 병력의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한순간이다. 프랑스군이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아쟁쿠르 전투는 최후까지 변함없는 군기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 채승병 전사연구가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8. 22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